[연출노트-11탄] 김도훈PD "입봉작 망하고 15년 인고 끝 '해품달' 탄생"

기사입력 2012.11.18 9:30 AM
[연출노트-11탄] 김도훈PD "입봉작 망하고 15년 인고 끝 '해품달' 탄생"

[TV리포트=이우인 기자] 올 초 방영돼 40%가 넘는 시청률로 시청자의 사랑을 독차지한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이하 '해품달'). '해품달'은 방영 내내 인터넷 검색어 순위를 장악했다. 아역부터 주·조연 할 것 없이 고르게 인기를 얻었다. 주인공 김수현은 '해품달'을 통해 단번에 아역 이미지를 벗고 톱스타 타이틀을 얻었다.

'해품달' 성공의 중심에는 김도훈 PD가 있었다. 김도훈의 드라마는 사람을 들었다놨다하는 긴장감이 넘친다. 하지만 이런 능력을 갖추기까지 김도훈 PD에게도 어마어마한 고통이 따랐다. 그의 고통은 드라마를 포기하고 싶을 만큼 심각했으며, 오랫동안 지속했다. 그리고 결국은 이겨냈다. 그만의 연출 스토리를 가감 없이 옮긴다.

◆ 죽음의 트라우마, 힘겨운 입봉기

내 인생의 고난은 미국에서 살던 초등학생 때 처음으로 찾아왔다. 한국전력에서 근무하던 아버지가 해외에 파견되면서 가족 전체가 4년 정도 미국에서 살았다. 인종차별이 심했다. 친구 엄마로부터 살해당할 뻔한 기억이 있다. 그는 단지 자기 아들과 친하게 지내는 게 싫다는 이유로 내 목을 잡고 수영장 물에 처박았다. 목 근육이 파열됐다. 끔찍했다.

법정 다툼까지 갔지만, 결과는 친구 엄마에게 유리했다. 정서불안이라며 무죄처리를 한 것. 그와 40~50분가량 사투를 벌였지만, 도와주는 이는 없었다. 다음 해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그 일을 포함해 미국에서 겪은 경험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한국에서의 생활 또한 평탄하지 않았다. 매일 공부만 강요하는 교육환경에 거부감이 들었다. 급격한 환경변화는 정서적으로 좋지 않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극예술을 좋아했다. 구하기 어려운 비디오를 모으는 게 취미였다. 대학교에서는 연극 동아리 활동을 했다. 취직할 때가 다가왔고, 내가 남보다 재미있게 잘할 수 있는 것을 연구했다. 연출이었다. 하지만 연극은 가난했다. 대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았다. 예술적인 직업을 가질 형편이 아니었다. 영화는 연극영화과 출신만 가능한 분위기였다. 그래서 결정한 직업이 드라마 PD였다.

조연출로 처음 참여한 작품은 김남원 선배의 입봉작인 '영웅반란'.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여서 많이 헤맸고, 혼도 많이 났다. 이후 '햇빛 속으로' '그 여자네 집' '전원일기' 등 다양한 작품에서 조연출로 일했다. 데뷔작은 '베스트극장-짝사랑'. 하지만 미니시리즈 연출의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자기 고집이 세고 말을 잘 듣지 않는 연출이라며 기회를 주려고 하지 않았다. 신경치료까지 받을 정도로 스트레스가 심했다.

◆ 따가운 시선 속에 만든 입봉작의 실패

왕따였다. 모든 사람이 나를 미워하는 것 같았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외국에 나가서 머리를 식히고 돌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직신청을 하려고 하는 와중에 생각지도 못한 기회가 찾아왔다. 새로운 데스크가 내게 기회를 준 것. 그 작품이 미니시리즈 입봉작인 '스포트라이트'였다. 두고 보자 하면서 열심히 만들었다.

기자와 앵커의 이야기. 여배우들이 서로 하고 싶어서 난리였다. 손예진이 하지 않기만을 기다리는 여배우들이 줄을 섰다. 하지만 손예진이 하겠다고 하면서 캐스팅도 원하는 대로 됐고, 중간에 사정이 있어 교체됐지만 작가도 '하얀거탑'으로 당시 핫한 이기원이었다. 물론 나를 미워하는 선배들은 여전히 따가운 시선을 보였다. 보란 듯이 잘하고 싶었는데, 망하고 말았다.

드라마가 안 되면 사람이라도 얻어야 하는데, 나는 드라마도 사람도 모두 잃었다. 드라마가 망하면 모든 책임은 감독이 져야 하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회사에서 나를 바라보는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망해가는 과정을 알고 있는데, 그 모든 걸 나한테 떠넘기니 사람이 싫어졌다. 대인기피증, 공황장애 직전까지 갔다. '스포트라이트'가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는 불안, 연출 인생은 끝났구나 했다. 혼자서는 극복이 어려웠다. 무작정 스페인으로 떠났다.

산티아고의 800km 순례길, 전 세계의 순례자들이 찾는 곳이었다. 세계적인 작가 파울로 코엘료도 이 길을 걷고 나서 소설가가 됐다. 한 달이라는 기간을 정해 혼자서 걷기 시작했다. 처음 일주일은 사람을 원망했다. 나중에는 걷는 게 힘드니까 생각이 없어지더라. 어느 순간에는 내 인생이 들어왔다. 드라마를 하라고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나는 왜 힘들다고 다른 사람 원망만 했을까?

◆ 대중과의 소통 깨닫게 해준 긴 방황기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좋은 사람을 만났다. 이탈리아 여자 두 명, 영국 남자 두 명. 그들은 순수했다. 조직생활에서 만난 사람들과 달랐다. 우리는 순례길을 함께 걷기로 했다. 밥도 함께 해먹고, 힘들면 서로 끌어줬다. 마지막 산티아고에 입성하는 날,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감동이 밀려왔다. 그들과는 지금도 연락하는 형제자매가 됐다.

대자연을 접하며 '세상을 흐르는 대로 겪어 보자'라는 마음이 생겼다. 하지만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TV주조정실로 발령이 났다. 드라마가 망하면 좌천되는 부서였다. 솔직히 자존심이 상했다. 마흔을 앞둔 시점, 더 늦기 전에 이직을 고민해보기로 했다. 산티아고에서 외국인 친구들과 요리하며 행복했던 추억을 떠올렸다. 요리를 독학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TV주조정실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드라마 예능 교양 MBC KBS SBS 할 것 없이 TV를 계속 보다 보니 시청자가 뭘 원하는지가 읽히기 시작했다. 시청자들이 보고 싶은 게 아니라 나는 내가 만들고 싶은 것만 만들었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됐다. 오랜 세월, 흥행에 실패한 원인을 깨달았다. 이후 블로그 트위터 등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1년간, 대중이 원하는 키워드를 정리할 수 있었다.

드라마국에 복귀했지만, 세상이 보는 나에 대한 시각은 변하지 않았다. 또 1년 정도를 놀게 됐다. 그 사이 난감한 일들은 계속해서 벌어졌고, 이직에 대한 생각은 갈수록 커졌다. 해외 요리학교로 갈 계획도 구체적으로 짜기 시작했다. 그런데 예기치도 못한 기회가 찾아온다. MBC의 드라마가 월화극 수목극 주말극 할 것 없이 3사 꼴찌를 하던 시기가 있었다. 갑자기 수목극 미니시리즈 3~4월이 펑크가 났고, 그때 내게 주어진 작품이 '로열패밀리'다.

◆ MBC 구원투수로 짜릿한 인생역전

오랜만에 찾아온 미니시리즈 연출의 기회. 당연히 반대가 심했다. 내 생애 마지막 드라마라는 각오로 만들었다. 5회부터 시청률 1위를 기록했다. 수목극으로 MBC가 1위를 한 게 오랜만이었다. 회사에서 인정받았다. '로열패밀리'를 만들며 7~8년 사이에 시청자들의 눈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연출에도 노하우가 생겼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로열 패밀리' 후속작 '최고의 사랑'이 성공한 이후 MBC 수목극의 잔혹사가 또다시 시작됐다. 방송을 4개월 반 남겨두고 2012년 1~2월 수목극 편성이 구멍난 것. 본부장과 국장은 때마침 내게 '해품달'을 맡겼다. 메디컬 드라마를 준비하던 시점이어서 처음에는 고사했다. 하지만 오랜 설득 끝에 제안을 받아들였다.

MBC가 미니시리즈로 사극을 한 건 '다모' 이후 10년 만이었다. 특집극 한 편을 제외하고 사극 경험이 없던 나는 헤매기 시작했다. 의상, 미술, 세트 등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심지어 사극은 캐스팅을 적어도 한 달 전에는 마쳐야 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좌충우돌은 심했지만, 1회부터 수목극 1위에 올랐고, 아역 분량에서만 30%가 넘는 높은 시청률을 올렸다. 경사가 났다.

'로열패밀리'에 이어 '해품달'까지 잘되면서 일에도 여유가 생겼다. 예전에는 쫓기듯 일했다면, 지금은 쫓기는 기분은 없어졌다. 바닥과 천장을 전부 겪어서 그런지 세상을 대하는 마음 또한 달라졌다. 내 앞에 놓인 수많은 우연을 불안해하고 필연으로 만들려고 하면 인생은 고달파진다. 마음껏 실패하고 체념해야 또 다른 성공의 발판을 발견할 수 있다고 후배들에게 말하고 싶다.

◆ 못다 한 이야기...

- 연출작 시청률 순위: '해품달' '로열패밀리' '스포트라이트' 순.

- 최고의 작품: '로열패밀리'와 '해품달'. 특히 '로열패밀리'는 어려운 환경에서 배우와 스태프, 연출 모두가 똘똘 뭉쳐서 만든 패자부활전 같은 작품이다. 모두가 불평 없이 열심히 만들었다. 지금도 '로열패밀리' 팀과 가끔 만나서 술을 마신다.

- 아쉬운 작품: '스포트라이트'. 지금의 내게 하라고 했으면,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방법을 알 텐데, 그때는 내 자아가 너무 강했다. 드라마의 본질보다 연출로 튀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나를 버릴 수 있어야 다른 모든 걸 품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 드라마 제작 단계 중 가장 힘든 단계: 초고 뽑을 때. 무형의 뭔가에서 유형의 활자를 만드는 과정이 고통스럽다.

- 궁합이 잘 맞는 작가: 작가들과는 항상 힘들다. 싸워도 살아야 하는 부부 관계 같다. 협업해야 하는데 자기 뜻을 관철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작가가 있다. 그런 면에서 '해품달'의 진수완 작가와 궁합이 잘 맞았다. 작품 들어가기 전에 좋은 분이라는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직접 해보니 그 이유를 알겠더라. 자기 고집이 있으면서, 동시에 연출을 배려하는 면이 많은 작가다.

- 앞으로 호흡을 맞추고 싶은 작가: 특별히 없다. 나와 관점이 비슷하고 협업을 잘하는 작가면 누구든.

- 같이 호흡을 맞춘 최고의 배우: 나는 이미지가 한쪽으로 굳어진 배우를 선호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김영애 전미선 안내상은 어떤 걸 투여해도 새로운 것을 밀도감 있게 끌어내는 최고의 배우들이다.

- 우려했지만 급격한 성장을 보여준 배우: 수애와 정일우. 수애는 연출 데뷔작인 '베스트극장-짝사랑'의 여주인공이었다. 내가 찾던 이미지였다. 연기 경험도 없고, 치아 교정기까지 낀 상태였다. 주위의 반대가 심했지만, 밀어붙였다. 방송이 나간 후 시청자게시판이 수애에 대한 관심으로 뜨거웠다.

일우는 tvN '꽃미남 라면가게'가 끝나고 2주밖에 쉬지 못한 상태에서 '해품달'에 투입됐다. 처음에는 연기의 스펙트럼이 다양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노력하는 배우는 처음 봤다. 매일 조금씩 연기가 늘더라. 보기 좋았다.

남보라는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배우. '해품달' 출연 초반에는 아이같이 나왔지만, 갈수록 성장했다. 연기적인 내공이 굉장한 친구라 생각한다. 앳된 외모는 단점이 될 수도 있지만, 자리를 잘 잡을 거라고 믿는다.

- 신인으로 발탁해 지금은 톱스타가 된 배우: 수애(베스트극장-짝사랑)

-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드는 배우: 망한 작품의 배우한테는 항상 미안하다.

- 다시 호흡해보고 싶은 배우: 좋은 배우가 워낙 많다. '로열패밀리'와 '해품달'에서 함께했던 배우들과는 다시 또 하고 싶다. 여진구 김유정 김소현 등 '해품달'의 아역들이 잘 커서 성인이 된 후 그들과 작업해도 참 재미있을 것 같다.

- 꼭 한번 해보고 싶은 배우: 하나의 이미지에 각인되는 배우보다 몇 가지가 복합돼서 나오는 배우를 좋아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전부터 호감있는 배우는 임수정이다. 청순 팜므파탈 백치미 등 다양한 이미지를 가졌다.

남자배우는 특별히 없었다가, 한 달 전쯤 우연히 술자리에서 송중기와 합석해 알게 됐다. 송중기는 화려하게 피어오르는 배우는 아니지만, 매 작품 연기가 진화하고 있고, 다양한 캐릭터를 하려고 하는 점이 좋다. 연기를 이미지가 아니라 본질로 접근하려는 면이 보인다. 그가 가진 인문학 쪽의 느낌 또한 마음에 든다.

- 연출에 영향을 준 연출자: 박성수 선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조연출로 박 선배와 특집극과 미니시리즈를 함께했는데, 감독으로서의 집요함 근성 진지함을 깨닫게 해줬다.

-자신의 작품을 한 문장으로 정의하면: '해품달'을 하면서 드라마의 영향력을 알았다. 위대한 사람들, 장인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다. 자기 것을 고집하는 사람이 바보가 되는 우스운 세상이 싫기 때문. 인간의 소중한 가치를 이야기하는 드라마를 추구한다.

- 연출자로 꼭 해보고 싶은 장르: 스릴러 장르. 한국 TV 시장에서는 어려운 장르지만, 기회가 되면 '로스트'나 '24'처럼 캐릭터를 스릴러로 풀어나가는 장르를 해보고 싶다.

- 현장에서는 언제까지: 힘닿는 데까지. 영원히 감독으로 불리고 싶다. 약간의 배고프고, 피곤하고, 졸린 상태를 좋아한다. 그래야 삶에 대해 긴장하고,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

김도훈 PD는? 1970년생 /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 1996년 12월 MBC 입사 / 대표작 - 스포트라이트, 로열 패밀리, 해를 품은 달 / 수상경력 - 2012년 휴스턴 국제영화제 TV미니시리즈 부문 플래티넘상, 2012년 상하이 국제 TV페스티벌 은상, 2012년 백상예술대상 작품상

이우인 기자 jarrje@tvreport.co.kr/ 사진=문수지 기자 suji@tvrepor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