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리포트=이우인기자] 이태곤 PD의 드라마는 대박 시청률을 올린 작품도, 크게 화제가 된 작품도 없다. 그의 작품을 통해 대박 난 배우 역시 없다. 하지만 이 PD의 드라마에는 한 마디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인간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두근거림이 있다. 그만의 연출 스토리를 가감 없이 옮긴다.
◆ 기자 꿈, 드라마 PD로 전환한 사연
고등학교 때부터 마냥 정의로워지고 싶었다. 기자가 되면 정의롭게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목표로 했던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기자 꿈은 대학교 입학과 함께 접었다. 내가 대학교에 다닐 때는 독재 시절이었다. 당시 기자들이 내 눈에는 무기력하고 무능력하게만 보였다.
기자 꿈을 접은 후 내 생각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직업을 찾았다. 당시 MBC에 좋은 드라마가 많았다. MBC 드라마 PD들은 선각자의 의무를 갖고 작품을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중 장수봉 황인뢰 선배의 드라마를 보면서 드라마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조연출은 햇수로 7년 동안 했다. '그대 그리고 나'와 '특별기획 山' '아들의 여자' '사랑과 행복' 'TV시티' '사랑해 당신을' 등을 만들었다. 최종수 이관희 이승렬 이진석 오현창 안판석 선배 아래에서 일하며 경험을 쌓았다. 그중 내 머리를 강하게 때린 작품은 이관희 선배가 연출한 '베스트셀러 강'이었다.
'강'은 서정인의 단편소설을 드라마로 각색한 작품. 늙은 대학생이 시골에 사는 친구가 결혼해 함을 들고 완행열차를 타고 오지로 가는 도중 겪는 로드무비 같은 이야기다. 극중 하룻밤을 묵게 된 시골집에 열심히 공부하는 한 아이가 나온다. 주인공은 이 아이를 보며 자신을 발견한다. 어릴 때는 천재 소리를 듣다가 시간이 지나 모범생이 됐지만, 사회에 들어가서는 출신 성분 때문에 낙제생이 됐다. 주인공을 보며 당시의 나와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 아이 낳는 고통과 닮은 연출 작업
입봉작은 베스트극장 '동보씨의 파랑새'. 김지수 이훈이 주인공이었다. 작가는 SBS '홍콩 익스프레스'를 쓴 고(故) 김성희였다. 작가도 나도 모두 이 작품이 데뷔작이었다. 첫 작품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즐거우면서도 힘들었다. 장편 드라마 데뷔작은 '12월의 열대야'였다. 첫 작품치고는 나쁘지 않은 성과를 올렸다.
연출은 신경을 분산시켜야 하는 작업이다. 사람과 작품, 음악 등 여러 가지에 신경이 곤두서야 해서 늘 괴롭다. 흔히 아이 낳는 작업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아이는 낳고 나면 행복하고 키우는 재미가 있다. 하지만 작품은 다 끝내고 나면 허탈하다. 우울증까지 걸린다.
작품을 끝낸 후 내가 느끼는 우울함은 가족을 비롯해 주변 사람이 걱정할 정도로 오래간다. '인수대비'를 연출하면서 머리 혈관이 찢어질 정도로 힘들었는데도, 끝나면 그렇게 공허할 수가 없다. 여행을 가든가 뭔가에 집중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상황이 온다.
내 작품 중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만한 히트작은 없다. 하지만 나름대로 부끄럽지 않게 연출했다고 생각한다. 내 연출 스타일이 독특하다는 이야기도 꽤 듣는 편. 이 정도로 인정받은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대박 작품을 만들겠다는 욕심은 크게 없다. 앞으로도 안정적으로, 좋은 연출로 계획된 드라마를 만들고 싶을 뿐.
◆ 고통스러운 제작 과정, 즐겁고 보람 있어
드라마 PD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다. 20년 동안 드라마 연출을 해오면서 '이 일이 아니면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봤다. 그런데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드라마 연출은 일할 때 흔적과 보람이 남는다. 끊임없이 공부해야 해서 공부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는 즐거움이 크다.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 누군가의 명령을 받는 직업이 아니라 반대의 경우이기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제어 받지 않고 계획하면서 살 수 있다. 무엇보다 양복을 입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좋다. 양복에 대한 끔찍한 기억이 있다. 20년도 훨씬 지난 일이지만 또렷이 기억한다.
1980년대 후반, 무더운 여름. 대학교 3~4학년이던 나는 술을 마신 채, 에어컨도 없는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서 어떤 사람을 봤다. 그 사람은 양복 재킷을 벗어서 한쪽 팔에 걸치고, 넥타이와 단추를 푼 상태였다. 한쪽 손에는 선물 보따리를, 다른 손에는 서류가방을 들고 있었다. 술을 마신 모습이었는데, 삼겹살에 찌든 냄새가 났다. 지옥을 본 것 같았다.
드라마 PD 역시 양복을 입는 일 이상의 고통이 따르는 직업. 하지만 고통보다는 즐거운 일이 더 많다. 현장에서 연기자들이 의도한 대로 연기해 줄 때, 사람들이 내 작품을 보고 '잘 봤다'고 말해 줄 때 뿌듯함을 느낀다. 한번은 교보문고에 갔는데 누가 내 등을 치며 나를 알아본 적도 있다. 드라마가 너무 좋았다며 울기까지 했다.
◆ 연출 공부는 태어날 때 스타트
연출 공부는 태어날 때, 첫 울음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사람과 세계관 등은 좋은 연출자에게 필요한 조건. PD가 방송국에 들어가서 배우는 건 테크닉에 지나지 않는다. 테크닉은 작품의 본질과는 관계가 없다. 잘 배웠다고 해서 좋은 연출자인 것은 아니다. 각성이 있으면 훨씬 유리하다.
10년 전까지는 드라마에 메시지를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시청자들이 내 드라마를 보면서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뿐. 잔잔하고 따뜻한 느낌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작품을 만든다. 비극 코미디 다 잘할 수 있다. 어쨌든 재미있는 드라마면 된다.
애석하게도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연출자가 우리나라에는 없다. 사람을 끝까지 죽일 것 같은 스탠리 큐브릭의 완벽주의, 우디 앨런의 풍성한 코미디적 상상력과 다작을 닮고 싶다. 찰리 채플린은 내가 감히 따라갈 수 없는 인물. 그의 천재성은 늘 감탄을 자아낸다.
현장에서는 혼자서 버틸 수 없을 불구의 몸이 될 때까지 일하고 싶다. 팔 하나, 눈 한쪽 없어져도 일에만 지장을 주지 않는다면 상관없다. 몸을 사리면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많은 사람에게 보이는 작품을 만드는 사람에게 고통은 당연한 일. 고통스러운 만큼 대가와 보상도 크다. 나는 지금의 고통을 즐긴다.
◆ 못다 한 이야기...
- 연출작 시청률 순위: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 20% 정도 나왔다. 이어 '그대, 웃어요'가 높았던 걸로. 그 외엔 낮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 최고의 작품: 베스트극장 10편 모두. 내 단막극에 나오는 남자주인공은 하나같이 연봉이 2000만 원을 못 넘는다. 김유석이 내가 연출한 단막극 4편에서 주인공을 도맡으며 드라마에 데뷔했다.
- 아쉬운 작품: 하나도 없다. 아쉽다는 건 다시 만들고 싶다는 의미인데, 다시 하고 싶은 작품이 없다.
-드라마 제작 단계 중 가장 어려운 작업: 대본 작업이 가장 어렵다. 그리고 캐스팅, 이후의 작업은 어렵지 않다. 촬영 때는 졸음을 참는 게 괴롭다.
- 생애 최고의 슬럼프: 촬영이 길어져서 반복적인 느낌이 들 때. 특히 작품이 연장될 때 그런 기분을 강하게 느낀다. 많은 연출이 연속극을 싫어하는 이유다. 초반엔 새로운 것을 만들다가 어느 순간 익숙해지고, 익숙함을 반복하다 보면 지겨워진다. 지겹다 보면 무기력해지고, 무기력하면 세상 모든 일에 심드렁해지기 마련.
- 궁합이 잘 맞는 작가: 문희정 작가. 두 번 호흡을 맞췄으니 잘 맞는 걸로.
- 앞으로 호흡을 맞추고 싶은 작가: 김영현 김은숙 작가. 김은숙 작가는 한번 같이 일해볼까 해서 만나기로 했지만, 아직 못 만났다.
- 같이 호흡을 맞춘 최고의 배우: 고(故) 최진실 엄정화 등 연기에 열정과 신념이 있는 배우 모두. 한 사람만 뽑을 순 없다.
- 우려했지만 급격한 성장을 보여준 배우: 이민정, 함은정(티아라). 이민정을 '그대, 웃어요'에 캐스팅할 당시, 주위에서 (이민정이) 연기를 못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런데 막상 맡기니 잘하더라. 은정은 굉장히 긍정적이고 열정이 있고, 매력적이다. '인수대비' 촬영할 때 모든 사람이 은정을 좋아했다. 연기도 굉장히 잘했다.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안다.
-신인이었지만 지금은 톱스타가 된 배우: 엄태웅.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사랑'이라는 베스트극장 단막극을 할 때 단역으로 캐스팅한 적이 있다. 지금의 잘된 엄태웅을 보며 '잘될 놈은 잘되는 거지' 했다.
-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드는 배우: 다 잘 됐는데 미안할 리가.
- 꼭 한번 해보고 싶은 배우: 르네 젤위거와 전도연. 연기하는 모습이 둘 다 참 예쁘다.
- 다시 호흡해보고 싶은 배우: 이혼했는데 뭐하러 또 만나나. 나는 무명의 배우가 좋다. 최근 드라마 PD들이 tvN '응답하라 1997'을 보고 패닉에 빠졌다더라. 예능 PD와 신인 작가가 만든 작품이라는 데 충격을 받은 것. '응답하라 1997'은 굉장히 잘 만든 작품이다. 내 작품도 그렇게 챙겨서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빠져서 봤다.
이태곤 PD는? 1968년생 / 한양대학교 신문방송학과 / 1993년 MBC 공채(93사번) 입사 / 대표작 - 12월의 열대야, 변호사들,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 그대 웃어요, 인수대비 / 2001년 제37회 백상예술대상 작품상
이우인 기자 jarrje@tvreport.co.kr/ 사진=문수지 기자 suji@tvreport.co.kr
?명이
함께 기사를
보고 있습니다.